GOOD NEWS(5)
제4부 : 모든사람이 죄를 범함!
좀 억울하다고 해야할까?
사실 선악과의 잘못은 아담과 하와가 저질렀지 나는 아니라고...
나에게 동일한 시험을 준다면 나는 선악과를
따먹지 않을 것이라고 혹시 말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글쎄...
아담과 하와에게 내려진 저주!
곧 사망!
이 세상이 사망의 저주아래 놓이게 되면서
이미 사망이 지배하는 가운데서 태어난 사람들은
결코 이기적이지 않고서는 잔인하지 않고서는
그 생존을 유지하기가 불가능하게 되었을 뿐이다.
태어나면서 사람은 그 부모로부터 이세상에서
생존해 나가는 방법을 배워나가게 된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수고와 노력을 해야하지만...
그 수고와 노력의 댓가로 노력한 만큼의 댓가를
내가 가져갈 수 있도록 하는 일이 인류가 번성하기
시작하면서 점점 어려워지게 되었다는 것!
내가 생존하기 위해서 누군가를 희생시켜야만 하는 상황이
어쩔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는 것!
동물들이 자기 생존을 위해서 자기보다 약한 동물을
잡아먹듯이 인간도 생존을 위해서 인간끼리도 서로 그러한
행동을 해야만 한다는 것을 양심에 거리낌없이 받아들여야만
생존은 보장된다는 것!
사망의 굴레 때문에 어쩔수 없는 잔인함이라고 했던가?
그러나 정말로 그렇케까지 잔인했어야만 했을까?
동물들은 배고픔이 충족되면 더이상 욕심을 내지 않지만...
인간은 정말로 그렇케까지 잔인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 가진 자유의지의 기회를 사용해서 그러한 잔인함을 자행한다.
왜냐하면, 스스로 절대양심을 바라보고자 하는 선택을
그져 무시했기 때문에...
인류 역사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는 굵직한 사건들의
대부분은 주로 전쟁 이야기들 뿐이다.
상생을 위한 화해와 타협의 역사보다는
정복하여 노예삼아서 자신들의 게으름을 누리기위한
잔인함과 잔혹함의 역사가 오히려 더 많을 뿐이다.
이 세상에 인류의 수가 많아질수록...
절대양심을 향한 두려움보다는 게으름을 향한
욕심이 오히려 인간의 마음속에서 주인이 되었을 뿐!
절대양심에 민감히 반응하는 자!
곧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던 성경의 구절의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누가 절대양심(하나님)을 찾고자 했던가?
NOBODY!!!
절대양심을 떠나버린 인간의 마음의 상태를 성경의
로마서 1장에서 그져 적날하게 묘사하고 있을뿐이다.
오늘날을 살아가고 있는 나는 로마서에서 묘사하고 있는
그 죄악의 행태들에 대해서 과연 얼마나 당당할 수 있을지?
만약에 나에게 이기적인 욕심과 잔인함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 오늘날 존재할수 없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결코 이러한 죄악들에 대해서 당당할수 없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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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사회가 그져 만들고 있는 죄!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돈을 많이 벌려면 양심을 그만큼 무시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체제가 만든 사회 시스템 안에서
CEO와 근로자들의 수고한 결과가 과연 그만큼의 돈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었냐는 것!
돈을 더많이 가져가는 조건에는 수고의 강도와
수고의 가치라는 두 기준에서 강도보다는 항상 가치에
우선순위를 두게 되는데...
가치라는 부분에 우선순위를 두게될때 전제조건은
양보의 미덕이 있다는 전제하에 비양심이 아니라는
정당성을 가질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가치우선주의는 이미 양심을 포기한지 오래이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빈익빈 부익부의 피라미드식
분배구조는 게으름을 제어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표면적으로
말을 하지만, 이미 게으름에서 벗어날수 없도록 양보의 미덕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에 결코 악(惡)에서 벗어날수 없게 되어있다.
양보의 미덕을 감사하게 여겨서 더 부지런해지기 보다는 오히려 더 게을러지려는 惡!
부지런하게 노력을 하지만 노력한 만큼 결과가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惡!
결론적으로, 돈을 많이 가진자나 적게 가진자나
그져 돈에 매일수 밖에 없다는 것!
돈의 노예!
곧, 악(惡)의 노예가 될수밖에 없는 것이
자본주의의 현실이다.
그 원인은 두사람에게 항상 하나의 떡만 허락하는
이 세상이 만드는 그러한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사망의 굴레 때문이다.
죄로인해 사망이 왔고, 다시 그 사망 때문에 죄는 그져 나타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