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24. 예수님의 통곡, 예수님의 분노 "누가복음 19:41~42"
근래 혹시 통곡할 만큼 슬펐던 적이 있으십니까? 혹시 물건을 부수거나 던질 만큼 분노한 적이 있으십니까? 분노조절장애가 있으신 분들은 보통사람들이 보기에 별 일 아닌 때도 분노를 폭발시키지만, 그러나 그가 느낀 분노의 감정 자체까지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온유하고 겸손하신 우리 주 예수님께서 통곡하시고 분노하셨다는 것은 그 만큼 사안이 중대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사건에는 우리 주님의 통곡과 분노가 동시에 담겨 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도착하셨습니다. 제자들과 수많은 사람들은 마치 왕을 맞이하는 것처럼 열렬하게 예수님을 환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며 통곡하셨고, 성전에서는 장사하는 사람들의 상을 뒤집어엎으실 만큼 분노하셨습니다.
통곡과 분노는 가장 강렬한 감정 표현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무엇에 그리고 왜 이렇게 강렬하게 감정적으로 행동하시게 되었을까요? 물론 몇 일 후면 십자가를 지게 될 현실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극도의 피곤함이나 고통이나 스트레스 상황 속에서는 감정표현이 격렬해 질 수 밖에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십자가의 희생은 그만큼 크고 놀라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통곡하신 구체적인 이유는 앞으로 다가올 예루살렘의 멸망을 먼저 내다보셨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하면서 당신의 백성들이 당할 고통을 바라보며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만큼 자기 백성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을 맡은 하나님의 백성들인데 왜 그들은 그런 처참한 결말을 피할 수 없게 되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구원의 때와 구원의 길을 몰랐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아는 만큼 들리고 아는 만큼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를 통해서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탄식하셨습니다. 나름대로 열심이 아니라 말씀대로 열심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가정교회의 세 축 중의 하나가 삶공부입니다. 삶공부를 소중히 여기십시다. 그리고 새해에는 토요 특별세미나가 정기적으로 준비될 것입니다.
앎의 기회, 배움의 기회, 성장의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구원의 때와 구원의 길을 알지 못했을까요? 성전이 성전의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들이 제사장의 역할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지금 이 시대의 교회를 바라보시면서도 동일하게 통곡하시고 분노하시지 않으실까요? 아무리 만신창이가 된 것처럼 보여도 교회는 세상의 마지막 희망입니다. 왕같은 제사장들인 그리스도인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